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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야정(莘埜亭)

진성이씨 신야정(眞城李氏 莘埜亭)

59.7x117.2x6.8 / 전서(篆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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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신야정(莘埜亭)
  • 글자체 전서(篆書)
  • 크기 59.7x117.2x6.8
  • 건물명 신야정(莘埜亭)
  • 공간명 진성이씨 신야정(眞城李氏 莘埜亭)
  • 서예가
  • 위치정보 안동시 도산면 하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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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야정(莘埜亭)

신야정(莘埜亭)


신야정(莘埜亭)은 퇴계의 형인 신야(莘埜) 이징(李澄, 1498~1582)의 현손 칩와당(蟄窩堂) 이장형(李長亨, 1597~1671)의 고택에 걸려 있는 편액이다. ‘신야’는 중국 유신국의 들판으로 은나라의 재상인 이윤(伊尹)이 노예 시절 농사지으며 은거하던 곳이다. 탕왕이 그가 어질다는 말을 듣고 세 번이나 사신을 보내어 데려와서 함께 대업을 이루었다.

서체는 전서(篆書)에 속한다. 전서는 필획의 굵기가 일정하고 시원한 맛의 소전(小篆)이 대표적이나 소전 이전의 문자로 필획의 굵기가 일정하지 않고 졸박한 맛이 있는 대전(大篆)이 있다. 이 편액은 소전의 일정한 필획과 대전의 졸박한 필획이 혼합된 성격으로 보이나 구사하는 필치가 원활하지 못하다. 머뭇거림이 심하고 맑고 트인 기운이 부족하다. 각서자의 부주의가 원인일 수도 있다. 

(서예가 恒白 박덕준)

진성이씨 신야정(眞城李氏 莘埜亭) 소개


진성이씨(眞城李氏) 신야정 집안은 진성이씨(眞城李氏)의 시조 이석(李碩)의 후손이다. 이석은 대대로 경상도 진보현(지금의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에 살았던 향리로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죽은 뒤 밀직부사로 임명되었으며, 이자수(李子脩)와 이자방(李子芳) 두 아들을 두었다. 이석의 맏아들 이자수는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이 통헌대부 판전의시사에 이르렀고 1363년(공민왕 12) 개경을 침략한 홍건적을 격퇴한 공로로 송안군(松安君)에 봉해졌다. 이후 왜구의 침략을 피해 진보에서 안동 마애로 옮겼다가 만년에 다시 지금의 예안 두루(주촌 周村)로 옮기면서 두루마을 입향조가 되었다.

이자수의 손자 이정(李禎)은 뛰어난 무예로 세종 때 북방의 오랑캐를 격퇴하여 변경 지방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데 적지 않은 기여를 하였다. 당시 건주위 추장 이만주(李萬住)가 변경을 위협하자, 이자수는 영변판관에 발탁되어 부사 조비형(曺備衡)을 도와 약산성(藥山城)을 축조하여 영변에 거진(巨鎭)을 설치하는 데 공적을 남겼고, 또 최윤덕(崔潤德)을 따라 모련위를 정벌하는 데도 공을 세웠다. 선산부사로 재직할 때는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어 명망을 얻었다. 나아가 여섯 명의 딸을 남백경(南伯庚)·유봉수(柳鳳壽)·정보문(鄭普文)·이주(李疇)·박근손(朴謹孫)·권종(權悰)에게 출가시켜 폭넓은 혼맥을 형성함으로써 가문이 향촌사회에서 재지적 기반을 튼튼하게 하는데도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정은 이우양(李遇陽)·이흥양(李興陽)·이계양(李繼陽, 1424~1488) 세 아들을 두었는데, 첫째 이우양은 무과에 급제하여 인동현감을 역임하였으며 그대로 예안 두루에 살면서 진성이씨 주촌파를 형성하였고, 그의 후손들 역시 두루를 무대로 가문의 위상을 더욱 공고히 하였다. 둘째 이흥양은 증조부 이자수가 진보에서 처음 이거하였던 안동 마애로 옮겨 진성이씨 망천파를 형성하였다. 막내 이계양은 예안의 온계리에 정착하여 진성이씨 온혜파를 형성하여 재지적 기반을 확대해 나갔고, 그의 손자대에 와서 온계(溫溪) 이해(李瀣, 1496~1550)와 퇴계 이황이 출현함으로써 진성이씨 가문은 조선 최고의 명문으로 발돋움하였다. 이계양의 호가 노송정(老松亭)이므로 그의 집을 노송정종택 또는 온혜종택이라 하며, 그곳에서 퇴계의 여러 형제가 태어났다. 퇴계의 부친 이식(李埴)은 전처 김한철(金漢哲)의 딸인 의성김씨(義城金氏) 사이에 2남 1녀를 두었고, 후처 박치(朴緇)의 딸 춘천박씨(春川朴氏) 사이에서 5남을 두었는데 서린(瑞麟), 의(漪), 해(瀣), 징(澄), 황(滉)이 그들이다. 퇴계의 바로 위의 형인 이징은 도산면 온혜리 면소재지의 북쪽에 자리를 잡았다.

이징의 자는 경청(景淸), 호는 이옹(伊翁) 또는 신야(莘埜)이다. 대과 응시를 위해 상경했다가 김안로(金安老)가 전형을 주관하는 것을 알고 과거를 포기하였다. 이후 과거 공부에 관심을 두지 않은 채 학문에 전념하던 그는 유일로 천거되어 참봉을 제수받았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543년(중종 38) 제원도찰방에도 제수되었으나 감사와 뜻이 맞지 않아 과감히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이징의 현손인 칩와당 이장형의 자는 가회(嘉會), 호는 칩와당(蟄窩堂)이며 부친은 이린(李璘)이다. 이홍중(李弘重)의 문인으로 문예와 필치가 뛰어났던 그는 1634년(인조 12) 증광시 생원에 합격하였으나 병자호란 이후 출사를 단념하고 향리에서 서책을 탐독하며 여생을 보냈다.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36호로 지정된 칩와당고택은 도산면 온혜리의 소재지 북쪽에 위치하는데, 전면에는 넓은 들이 펼쳐지고 뒤편에는 야산이 자리한다. 퇴계의 형인 신야 이징을 봉제사하는 실질적인 종택 건물로 정면 6칸, 측면 1칸의 일자형 문간채와 측면 2칸, 정면 5칸의 ㄷ자형 안채가 어우러진 튼 구자형 와가이다. 안채는 가운데에 마루를 두고 좌우에 온돌방을 배치하였으며 각 방은 각기 부엌과 아궁이로 연결된다. 문간채는 사랑채를 겸하며 우측에 마루를, 좌측에 방을 두었고 방 안에 신주를 모시는 감실을 배치하였다. 출입은 좌우에 설치된 문으로 하며, 건물 좌측에 방앗간이 있다. 안채는 막돌로 기단을 쌓고 그 위에 자연석 주초를 올리고 각주를 세웠으며 좌우 익랑에는 툇마루를 달았다. 벽체 일부와 보일러실 마련을 위해 일부가 개조되었으나 전반적으로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전체적인 평면 구성과 구조 양식, 수납 공간과 편의를 도모하는 곳곳의 쪽마루, 그리고 환기창 등은 19세기 주택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참고문헌
  • 『한국의 편액Ⅱ』, 한국국학진흥원, 2016.
  • 『안동의 현판(上)』, 안동민속박물관, 2004.
  • 『안동시사』, 안동시사편찬위원회, 1999.
  • 설석규, 「온계 이해의 학문세계와 현실대응 자세」, 『온계선생종택복원낙성식』, 온계선생종택복원추진위원회, 2011.
  • 정우락, 「영남의 큰집, 안동 퇴계 이황 종가」, 『경북의 종가문화』 5,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2011.